‘데이’ 중독:: 그냥 아무날도 아니었으면
2006-11-16 eKongbu
‘밸런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까지는 알겠는데, 3월 3일이 ‘삼겹살 데이’고, 5월 2일은 ‘(오이 먹고 오리고기 먹는)오이 데이’, 11월 11일은 ‘빼?로 데이’라는 말에 ‘그냥 평범한 하루’는 언제인지 고민이 되더군요. “‘밸런타인 데이’에 늙수그레한 회사 아저씨들이 대놓고 초콜릿을 바란다”고 여성 직원들이 수군대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데이’들은 삶의 활력을 느끼고 서로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다는 취지에서 벗어나 꼭 뭘 주고 받거나, 특정 메뉴를 먹거나, 정해진 의식을 치러야 하는 의례적인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데이’ 때 선물을 주지 못하면 원망을 사고, 받지 못하면 섭섭합니다. 아예 주고 받을 일이 없으면 더욱 허탈하고요.
이런 갖가지 비공식적인 ‘데이’뿐 아니라 연인이 만나 100일 되는 날, 1년 되는 날 등 사적인 기념일도 스트레스를 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기꺼이 “오늘은 며칠째 되는 날이니까”라는 식의 이유를 달아서 이벤트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학습의 동물이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만난 지 100일이 되는 날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면 200일이 되는 날을 앞두고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바라게 된다는 말이죠. 기대가 커지는 것만큼 ‘그날’이 다가올수록 해줄 사람과 받을 사람의 긴장은 점점 더 커집니다. 그리고 어느새 호의와 친밀감의 표시를 위한 이벤트라는 본래 의미는 퇴색하고 의무감만 팽배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가끔씩 돌아오는 기념일이나 특정한 ‘데이’는 재미없고 건조한 일상에 재미를 선물합니다. 그렇지만 지켜야 할 ‘데이’가 너무 많아 챙기기 급급하고, 특별한 이벤트 없이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마음이 무거운가요? 그러면 문제지요. 선물 받기, 기념일 챙기기 등은 기대와 만족의 함수 관계 안에 존재합니다. 처음에는 마냥 기쁘고 좋기만 하지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첫 경험이 안겨주던 흥미는 점차 줄어들고, 관계의 깊이에 비례해 기대감만 높아집니다. 부풀어가는 기대감만큼 만족감은 줄어들고요. 성과급이 월급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서먹서먹하고 피상적인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각종 ‘데이’를 만들어 서로를 엮어갑니다.
대인관계에서나 사회생활에서 자꾸 늘어만 가는 이 ‘기념해야 할 날들’. 이런 상투성의 벽을 깨는 길은 무작위성과 즉흥성에 있습니다. “그냥 네 생각이 나서”, “오늘 다 같이 점심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라는 식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겁니다. 영화 ‘아비정전’에서 아비가 수리진에게 다가가 “1960년 4월 16일 3시 1 분 전을 우린 함께 했어. 난 항상 이 순간만을 기억할 거야”라고 하지요. 슬롯머신은 언제, 어느 자리에서 잭팟이 터질지 알 수 없기에 사람들이 자꾸 동전을 집어 넣게 됩니다. 마음 가는 대로 즉흥적으로 행동해 상대방이 당신의 ‘법칙’을 예견할 수 없을 때 그(혹은 그녀)는 도리어 당신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 그것이 최근 범람하고 있는 기념일 홍수로부터 우리가 얻을 교훈입니다.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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